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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마을은 현재와 공존하는 역사
표선면 성읍리에 위치한 성읍마을은 옛 제주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입니다. 마을을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로 중산간도로, 1163호선, 번영로 등을 방문하기 편리하고, 다른 민속마을과 달리 사람들이 실제로 마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16년 세종 5년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된 정의현청이 이곳으로 옮겨진 후 500년 동안 현청의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정의현성에는 110여 채의 가옥이 있고, 성 밖에도 많은 가옥들이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도읍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정의향교와 통일헌은 도내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일헌관 주변의 느티나무 1그루와 편백나무 3그루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제주민요 등 도내 무형문화재와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일훈, 고평오, 이영숙의 가옥들이 조선시대 도시주거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을 내 전통 민박집에 머물며 문화유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삶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읍리는 원래 제주도가 3현(1410~1914)으로 분할될 당시 정의현의 도읍지로, 제주도의 옛 민가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 무형의 문화유산이 일괄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옛 마을 형태의 민속경관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민속마을로 지정, 보호되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500년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문화
성읍마을은 조선 태종 10년(1410)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했던 읍치(ment治)가 세종 5년(1423) 이곳으로 옮겨진 이후 500년 동안 정의현의 중심지였던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의현은 원래 오식의 추천으로 성산읍 고성리에 정의현을 세웠으나 읍치가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행정상 불편함은 물론 태풍 피해가 잦고 우도가 근접해 외부 침입이 잦아 세종 5년(1423) 현치(현 읍치)를 진사리(현 표선면)로 옮기자고 전 조정장의 권유를 받은 곳입니다. 일명 진사성으로 불리는 정의성은 세종 5년(1월 13일) 공사가 시작된 지 5일 만에 완성된 곳으로, 전체 둘레는 2,986척, 높이는 13척입니다. 성 안에는 3개의 문이 있었고 성 안에는 2개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성읍마을에는 옛 민요, 향교, 옛 관아, 돌하르방, 연자방앗간, 성터, 비석 등 유형문화유산과 민요, 민속놀이, 향토음식, 민속공예, 제주방언 등 무형문화유산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느티나무, 팽나무 등 천연기념물은 500년 수도로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초가 제주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성읍민속마을은 초가 제주에 사는 성읍리 주민들과 제주의 전통화장실인 통시 등을 실제로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을 안에 고풍스러운 고목과 돌담, 고담 등의 모습은 500년 수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동체신앙과 개인신앙이 공존하는 곳
마을신앙은 공동체신앙이다. 무속에서는 당 신앙이 중심이 되고 유교 제례 의식에서는 포제가 중심이 된다. 제주도 무속은 오랜 삼현제의 영향을 받아 목안, 대정, 정정이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유교 마을 축제가 바로 포제이다. 과거에는 다양한 제사 의식이 있었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대개 포제이다. 도시 마을에서도 포제는 오래 전부터 행해져 왔다. 포제는 여느 마을과 다름없기 때문에 지역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마을을 포함한 인근 지역의 포제는 어느 정도 독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 공동체의 신앙과 달리 개인적인 신앙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개인적인 신앙이 과거처럼 신성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고, 원래는 공개적으로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신앙은 제례를 중심으로 파악해야 한다. 유교 마을 축제는 종합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 이제 남은 것은 포제(제석산) 밖에 없다. 제석산(제석산)이라는 이름이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각각의 제례는 성읍 1리와 2리에서 행해지고 있다. 1리와 2리의 포제는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 원래는 한 마을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마을 외곽에 절이 많았으나 이형식 목사가 사당과 사찰을 파괴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영주산 동쪽과 서쪽에 절터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정수암(정소암)이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오늘날 성읍리 사람들의 종교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성읍리에는 종교 기관이 많지 않다. 절에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부분 마을 밖의 절로 간다. 이런 현상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교회나 성당에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재 절이 있어 소실되어 폐사되었고, 교회는 1리에 1개, 2리에 1개씩 2개뿐입니다. 기독교 교회로는 성읍 1리에 있는 성읍교회와 성읍 2리에 있는 가나안성교교회가 있습니다. 성읍 1리에는 한국불교(宗鵬禪一 鵬禪)와 법성사의 일부가 있었는데, 현재는 모든 절이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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