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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의 개요와 청보리축제, 목장

비오비스토리 2023. 12. 1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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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파도

 

가파도의 개요

제주도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가파도는 마치 가오리가 위에서 바다를 헤엄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오리(가파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가파도가 되었다는 설과, 덮개 모양 때문에 가파도라고 불렸던 것이 가파도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작은 섬은 상동과 하동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가파도 면적은 0.9 평방 킬로미터이고, 인구는 281명(2007년)입니다. 해안선의 길이는 4.2km이고, 봉우리는 20.5m입니다. 대정읍 모술포항에서 남쪽으로 5.5km 떨어진 곳에 남쪽에 마라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도, 개파도, 가을파지도, 더우섬, 더푸섬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습니다. 1653년, 네덜란드 사람인 하멜이 제주도 근처에서 표류하여 조선에서 14년 동안 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케파트라는 이름이 소개됩니다. 1750년(영조 26) 제주목사가 소 50마리를 방목하여 왕실의 공물을 바치는 동안 소를 보호하기 위해 40여 가구가 마을에 출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섬 전체가 접시 모양의 평평한 지형을 가지고 있고 토양의 풍화가 높아 농사에 유리합니다. 제주특별자치도 부속 섬 중에서 물 여건이 가장 좋고 주변 바다에 어업 자원이 풍부합니다. 전복, 소라, 옥어, 옥어, 젓갈 등 특산물이 유명하고 유적으로는 조개무지, 돌, 고인돌군 등이 있으며 해녀 노 젓는 소리, 방아쇠, 맷돌 등의 민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모술포항에서는 하루 두 번 정기선이 오갑니다.

가파도 청보리축제

가파도의 항구 근처에는 자전거를 빌려 타는 곳이 있지만 오르막길은 없고, 주변을 둘러보는 데 걸어서 1~2시간이 걸립니다. 이전에는 최남단 마라도로 인해 비교적 외진 곳이었지만, 청보리 관광과 올레길이 생기면서 매일 정기적으로 3~4척의 여객선이 왕복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가파도는 상동(윗마을)과 하동(윗마을)으로 나뉘는데, 유일한 항구인 하동의 파포구를 중심으로 마을이 번성했지만, 현재는 상동항 인근에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올레길에는 가파도를 거닐거나 중앙을 가로질러 마을과 청보리밭을 볼 수 있는 코스가 있습니다. 가파도 하면 청보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닷일에 여념이 없고 농사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주민들이 파종하면 잘 자라는 보리농사를 지어 밭을 놀렸습니다. 가파도보리는 키가 1m가 훌쩍 넘는 재배종입니다. 작은 바람도 불어도 보리의 물결이 넘칩니다. 일손 없이 심은 가파도보리는 돌담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면서 지금은 유명한 관광자원이 되었습니다. 매년 4월 초부터 5월 초까지는 가파도청보리축제가 열리고, 청보리밭 걷기, 올레길 보물찾기, 야외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립니다. 1751년(영조 27) 제주도 목사 정연유가 소 방목을 허락하자 사람들이 들어와 가파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약탈이나 공도 정책으로 많은 섬들의 역사가 단절되었듯이, 가파도에도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실제로 가파도에 서식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으로, 현재 제주도에는 180여 개의 고인돌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가파도 주민들이 본섬 모술포와 봉화를 이용해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물과 식량이 부족하자 1개의 봉화가 내려졌고,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2개를 올리고 3개를 키웠으며, 모술포는 필요한 배와 물자를 가파도로 보냈습니다.

소와 말을 키우는 목장

가파도에 소와 말 목장을 설치한 이유는 누구나 방문해 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섬의 지형이 평탄하고 풀이 많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별도의 울타리를 세울 필요가 없는 바다가 자연의 경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 말은 전쟁 때나 사람이나 집을 운반할 때 파발마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의 자동차나 탱크 역할을 하면서 매우 중요한 도구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섬에 말을 많이 기르는 목장이 많았습니다.가파도 목장에 관한 문헌을 보면, 1491년(성종 22)에 세 마리의 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1750년(영조 26) 제주목사 정언유에 의해 가파도를 위한 별도의 분묘장이 생기자, 매년 소를 사육하여 조정에 진상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40년 영국의 사마랑이 가파도에 침입하여 소를 약탈당했습니다. 헌종 8년(1842) 제주목사 이원조가 제주도민들에게 가파도 개간을 허락하였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농경지에 적합하여 농사철에만 최초로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고종 2년(1865) 제주에 대기근이 일어났고, 이때부터 가파도에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약 140여 년 전에 대정읍 상모 등 총 33명이 처음으로 경작에 참여했습니다.초창기 가파도의 개척자들은 마제포라는 말을 나르는 항구에 마을을 형성했습니다. 남쪽 방향으로 북풍을 선박이 안전하게 주차하고 차단할 수 있는 곳으로 살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그런데 1923년에 북쪽 하동포구 일대가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가파리는 상동과 하동 두 마을이 있는 자연 마을인데, 원래 모술포와 함께 모시리(상동)로 연결되는 유일한 항구였습니다. 그러나 송전선이 출현하면서 모술포와 더 가까운 항애(하동)항이 가파도의 대표적인 항구로 변했습니다. 갑자기 동네가 번창하여 지금은 하동의 경제 지구가 가파도의 중심지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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